일본 엔화 가치가 계속 추락하면서 11월 3일 원·엔 환율이 870원대까지 떨어졌다. 나 홀로 ‘돈 풀기’ 기조를 고집해 온 일본의 통화정책이 엔화를 급격히 끌어내리고 있다. 시장에서는 올해 탈중국 자본의 본격 유입 등으로 일본 경제성장률이 2.0%(일본중앙은행 10월 전망 기준)에 달할 정도로 괜찮은 상황에서 경제 펀더멘털의 총합이라는 통화 가치가 급락하자 의외라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일본 정부는 역대급 엔저를 통해 고질적 디플레이션을 완화하고 수출 경쟁력 제고에 방점을 두는 모습이다.
실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경기 부양을 위해 13조 1,000억 엔(약 116조 7000억 원)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나친 엔화 가치 하락이 소비 여력을 떨어뜨려 성장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동시에 나온다.
11월 1일 오전 일본 도쿄 재무성. 출근하는 재무성 2인자 간다 마사토 재무관에게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전날 일본은행(BOJ)은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장기 금리 변동 폭이 상한선인 연 1%를 웃돌아도 용인하겠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그런데도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환율은 150엔을 뚫고 151.69엔까지 치솟는 등 엔화 가치가 33년 만에 최저 수준에 근접하게 급락하자, 당국 대책을 물은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있는데, 나 홀로 마이너스 금리(-0.1%)를 유지해 온 일본이 결국 통화 가치 급락 사태를 맞고 있다. 10월 31일 BOJ의 조치는 국채 금리 상승을 용인해 사실상 긴축에 가까워지는 움직임이었지만, 시장에선 도리어 엔화 투매 현상이 벌어졌다. 최근 ‘슈퍼 엔저’의 바탕엔 물가가 올라도 긴축하기 어려운 일본의 딜레마가 자리 잡고 있다.
◉ 엔화 값 하락하는 이유
엔화 가치가 하락하는 건 각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와중에도, 일본이 사실상의 <제로 금리>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중앙은행은 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초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유지 중이다. 시중에 돈이 계속 풀려있게 해 일본의 만성적 저물가·저성장을 해결해 보겠다는 취지이다.
◉ 마이너스 금리 日, 통화 가치 급락
간다 재무관은 이날 “지금 움직임의 배경엔 투기 세력이 있다”라고 했다. 헤지펀드 등 환(煥) 투자자들은 일본 당국이 당장 시장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엔 쇼트(매도)에 나서는 양상이다.
작년 10월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32년 만에 150엔을 돌파한 이후, 올 초 엔화 환율은 120엔대까지 빠르게 떨어졌었다. (엔화 강세 추세) 이때는 투자자들이 ‘곧 엔화가 강세로 갈 것’이라고 보고 엔화를 열심히 사들였다. 아베노믹스 기간인 지난 10년간 장기 집권했던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가 퇴임하고 새 총재가 오면 대규모 돈 풀기 일변도였던 일본의 통화정책도 정상화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4월 취임한 우에다 가즈오 총재가 공식 석상에서 연거푸 “금융 완화를 계속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도로 엔화 가치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미국은 금리를 더 올려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5.0%를 넘나들었다. 연 0.8~0.9%를 오가는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와는 큰 격차다. 지난달 급기야 엔화가 달러당 150엔대에 육박했는데도 외환 당국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변정규 미즈호은행 서울지점 전무는 “많은 시장 참가자가 BOJ를 (구두 개입만 하고 실제 개입하지는 않는) ‘종이호랑이’로 보고 있다”라며 “이렇다면, 연말까지 엔화 환율이 155엔 선까지 터치할 수도 있다”라고 내다봤다. 국제 시장에서 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바람에 11월 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이 장중 100엔당 892원까지 하락, 2015년 5월 이후 8년 반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작년 엔화 환율이 150엔을 돌파했을 때는 한국 원화도 동반 약세를 보이면서 달러당 1,500원에 근접하기도 했지만, 최근 원화 환율은 달러당 1,350원대를 기록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엔화에 비해서는 원화가 강한 모습이다. 엔저가 계속되면 일본 수입 물가가 올라 소비자물가도 자극받는다. 이런 상태가 장기화하면 달러로 환산한 일본의 구매력이 낮아지고, 국제 통화로서의 엔화 위상도 떨어지게 된다.
◉ 원과 엔 환율 880원 선 붕괴
미국의 금리 인상이 마무리됐다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원화 환율이 이틀 연속 급등했다. 반면 대규모 금융 완화를 지속하고 있는 일본 엔화는 원화 대비 약세를 나타내면서 2008년 이후 가장 낮은 870원대까지 밀렸다.
11월 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20.5원 오른 1322.4원에 거래를 마쳤다. 전날 14.4원 급등한 데 이어 이날까지 2거래일간 34.9원 뛰었다. 원화값이 1,320원대를 밟은 것은 지난 9월 4일(1319.8원) 이후 두 달 만이다.
반면 원화 강세에 영향을 받은 엔화가치는 15년 9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날 100엔당 엔화값은 전 거래일 대비 12.9원 내린 879.93원으로 거래를 마감했다. 원화가 뚜렷한 강세를 보인 반면 엔화 가치는 일본은행이 통화 완화 정책을 일부 수정했는데도 '정책 변화가 크지 않았다'라는 시장 평가로 달러당 150엔 선에 머물며 약세 흐름을 이어가고 있어서다. 지난달 10월 31일 일본중앙은행은 수익률 곡선 제어(YCC)를 일부 수정해 장기 금리 지표인 일본 국채 10년물 금리가 1%를 초과해도 시장 상황에 따라 일정 부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을 '사소한 변화'로 평가하며 실망한 투자자들의 엔화 매도가 이어지고 있다.
◉ 엔저의 장점
이런 단점에도 엔저가 가져다주는 장점이 훨씬 많기에 일본 정부가 이를 용인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엔화 약세를 통해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동반한 경기 침체)에서 확실히 탈출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엔화 가치와 기준금리 정상화에 나설 것이란 얘기다.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권영선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본부장은 “엔저로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오르고, 관광수지가 개선되고 수출 경쟁력이 살아나면 결국 세수가 늘어 일본 재정에 도움이 된다”라며 “BOJ가 올해 성장률을 1.3%에서 2.0%로 크게 높여 잡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엔화 값이 싸지면 외국인 관광객 증가로 일본의 관광 수입도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더 크다는 평가도 많다. 수입 물가가 급격히 뛰고 있기 때문이다. 원유 등 주요 자원을 해외에 의존하는 일본은 원자재 수입에 막대한 비용을 써야 해 그로 인한 국민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다.
금리가 너무 오르면 정부의 국채 이자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물가가 올라도 쉽게 금리 인상 등 긴축으로 가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일본의 국가 채무는 GDP(국내총생산)의 263%에 달한다. 한 해 갚아야 할 국채 이자만 9조 5,000억 엔이 넘어간다는 분석도 있다.
일본 정부가 엔저를 방관하는 진짜 속셈은 엔저를 통한 수출 장려로써 경제를 활성화해 보겠다는 것이다. 시장에선 BOJ가 내년 4~5월 일본 재계와 노동계의 봄철 임금 협상인 춘투(春鬪)에서 임금인상률을 확인한 뒤 임금과 소비의 선순환을 통한 디플레 탈출에 확신을 가져야만 마이너스 금리 정상화와 엔저 탈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 자료; 서울경제, 관련 기사, 2023.11.3./ 조선일보, 관련 기사, 2023.11.1./ 매일경제, 관련 기사, 2023.11.4.